말씀의 원작자를 만나셨습니까?

말씀의 원작자를 만나셨습니까?

20260503 함께지어져가는교회 설교

말씀의 원작자를 만나셨습니까?

마태복음 7:28-29
28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의 가르치심에 놀라니
29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그들의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제주에서 만난 형님이 있습니다. 평소에는 편하게 지내는 형님이셨는데, 뮤지컬 작가시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 형님의 작품을 직접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육지에 올라와서 기다리던 형님의 뮤지컬 작품을 보게 되었는데 역시 매우 뜻깊고 감동이 있었습니다. 뮤지컬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매우 생동감 있게 잘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약간의 과장을 더하자면 마치 각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들이 마치 형님이 제게 말하듯이 들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그 형님과 나누던 대화들과 생각들이 고스란히 뮤지컬 속에 녹아져 있었습니다. 뮤지컬을 보기 전에 어떤 뮤지컬일까 궁금해서 후기들과 댓글들도 살펴보고 녹화된 뮤지컬을 온라인으로 보기도 하였지만, 다른 이들이 평가하는 뮤지컬과는 다른 확실한 감동이 있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원작자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대사 하나하나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느껴지고, 문맥과 흐름이 제게 매우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웃고 울고를 반복하며 무대의 배우들과 제가 공감대를 형성하며 같은 장면 안에 있는 듯 하였습니다. 오늘 성경은 이것을 놀라움이라고 표현합니다. 28절의 ‘놀라니’는 헬라어 ‘에크플레쏘(ekplesso)’로서 단순히 감탄하는 수준이 아니라 “정신이 나갈 정도로 타격을 받다”, “압도당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부터 산 위에 앉아 모인 자들을 향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산상수훈의 모든 가르침에 대한 무리들의 반응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단순히 지식적인 호기심을 채운 것이 아니라 인생의 기초가 흔들리는 경험을 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이 그동안 서기관들을 통해 들었던 그 어떤 말씀과 다르다고 이야기 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권위 있는 자의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당연합니다. 말씀이신 예수님이 말씀을 하셨으니까요.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이시며 모든 순간을 함께 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하나님 나라를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서기관들은 말씀을 기록하고 연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가르침에도 놀라움이 있고 지혜와 지식적 가치가 있을 수 있겠으나, 원작자이신 예수님을 넘어설 수 없는 것입니다. 서기관들은 그들이 연구한 말씀과 전통들, 행동 양식들을 가르치는 자라면, 예수님은 모든 열방의 본질이며 기초인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때문에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은 모든 무리들은 압도 당하였습니다. 서기관들이 말씀의 권위를 나타내고자 여러 가지 방법을 사용하였다면 예수님은 말씀 자체이시며 말씀의 권위 자체이신 것입니다. 때문에 무리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에 압도를 당한 것입니다.

그 당시 서기관들의 가르침은 일종의 ‘각주’와 같았습니다. ‘과거 어떤 랍비는 이렇게 말했고, 어떤 전통은 저렇게 말한다’는 식으로 남의 권위를 빌려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각주가 필요 없는 ‘본문’ 그 자체이셨습니다. 서기관들이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도’를 열심히 설명했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그 나라로 직접 데려가 ‘풍경’을 보여주셨습니다. 지도를 보는 것과 풍경을 마주하는 것, 어느 쪽이 우리의 영혼에 타격을 주겠습니까?

우리는 수많은 설교와 가르침을 듣고 배웁니다. 본인의 열정만 있다면 하루 온종일 말씀을 들을 수도 있고, 배울 수도 있습니다. 명석한 연구가나 설교가를 통해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을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의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같이 크게 놀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성경은 그들이 놀란 것을 이야기 하지만, 그들의 삶이 변하였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사실 마태복음 5장의 산상수훈의 시작은 예수님이 산 위에 앉으시고 제자들을 가르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나 7장의 산상수훈의 마지막은 무리들로 마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특별한 누군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갈급한 모든 영혼에게 전달되고 삶을 변화시키는 놀라운 능력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자 많은 무리들이 모여 귀를 기울였습니다. 깨달음과 감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국 제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열매로 그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게 되고,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 때에야 세워진 집의 기초가 반석인지 모래인지 알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제자들을 향한 작은 속삭임으로 시작하였으나, 결국 무리를 향한 천둥소리로 마치게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 듣는 이들의 삶을 흔들고 새롭게 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말씀을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닌 행하는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고 경외할 수는 있으나, 나 중심의 삶에서 하나님의 중심의 삶으로 변화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결국 제자들과 무리들의 차이는 예수님과 동행하는 것이며, 함께 사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과의 관계를 통해 좋은 열매를 맺고, 반석 위에 집을 세우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말씀을 들을 때, 간혹 이전과 다른 은혜를 받았거나 깨달음을 얻을 때가 있습니다.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는 것이죠.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이 변하는 것과는 또 다른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에도 변하지 않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왜 어떤 이는 놀라기만 하고, 어떤 이는 변할까요? 그것은 동의와 항복의 차이입니다. 무리는 예수님의 논리에 동의했습니다. ‘와, 정말 맞는 말씀이네!’라며 박수를 쳤습니다. 하지만 제자는 예수님의 권위 앞에 항복했습니다. 내 인생의 주도권을 그분께 내어드린 것입니다. 동의는 내 삶의 자리에 앉아서 고개만 끄덕이는 것이지만, 항복은 내 자리에서 일어나 그분의 뒤를 따르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의 가르침에 삶이 변한 자들은 바로 말씀에 항복하여 예수님과 동행한, 동고동락한 제자들이었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많은 시간을 예배와 말씀을 연구하는 것에 보낸다 하더라도 그것이 종교 행위로만 마친다면 결국 아무 소용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야 합니다. 인격적인 교제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도 살아 운동력이 있는 살아 있는 말씀이 되어 내 삶을 흔들고 인도하는 능력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야 하는 것이 있다면 성경의 말씀이 마치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시듯 내 삶이 변화되길 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저 알고 느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하나님 제게 말씀하시고 제 삶을 움직여 주십시오.’ 라고 고백하는 것이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이 ‘함께지어져가는교회’에서 매주 만나는 이유는 단순히 성경 지식을 업데이트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매 순간 우리 인생의 원작자이신 그분을 대면하기 위함입니다. 원작자를 만난 사람은 더 이상 후기나 댓글에 의존하지 않습니다. 남들이 말하는 예수님이 아니라, 오늘 내 삶에 직접 말씀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기 때문입니다. 그 음성은 때로 우리 인생의 모래성을 무너뜨리는 천둥소리처럼 들릴 것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그 소리는 우리를 망가뜨리려는 소리가 아니라, 결코 무너지지 않는 반석 위로 우리를 초대하시는 사랑의 부르심입니다.

여러분, 뮤지컬을 보고 감동의 눈물을 흘렸다고 해서 제가 뮤지컬 배우가 되거나 작가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말씀에 압도당해 ‘아멘’을 외쳤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우리의 인생이 반석 위에 지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무리는 산을 내려가며 ‘오늘 참 좋은 강연이었어’라고 말하며 다시 자신의 모래성으로 돌아갔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제자는 그 권위 있는 음성 앞에 자신의 설계도를 찢어버리고 예수님의 설계도를 받아 든 사람입니다. 오늘 이 예배의 문을 나설 때, 여러분은 단순히 ‘놀란 무리’로 남으시겠습니까, 아니면 그 말씀에 삶을 던지는 ‘제자’가 되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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