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이켜 그를 보시며

돌이켜 그를 보시며

20260802
함께지어져가는교회 설교

돌이켜 그를 보시며

마태복음 9:18-26
18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에 한 관리가 와서 절하며 이르되 내 딸이 방금 죽었사오나 오셔서 그 몸에 손을 얹어 주소서 그러면 살아나겠나이다 하니
19 예수께서 일어나 따라가시매 제자들도 가더니
20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
21 이는 제 마음에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 함이라
22 예수께서 돌이켜 그를 보시며 이르시되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즉시 구원을 받으니라
23 예수께서 그 관리의 집에 가사 피리 부는 자들과 떠드는 무리를 보시고
24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25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26 그 소문이 그 온 땅에 퍼지더라

최근에 종영한 드라마가 있습니다. 안경 쓴 아저씨가 딸을 구하는 내용의 드라마인데, 제가 왜 이 드라마에 심취하게 되었는지 생각해 보니, 저도 안경 쓴 아저씨라는 것이 너무 마음에 들었고, 자녀를 가진 아빠로서 특별히 딸의 아빠로서 아비의 마음이 무엇인지 알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드라마의 발단은 두 여자 학생의 싸움으로 시작됩니다. 물론 한 아이는 대기업의 남부러울 것이 없는 딸이었고, 한 아이는 평범한 김부장이라는 사람의 딸이었습니다. 사실 싸움이라기보다는 괴롭힘에 가까웠는데, 김부장의 딸이 반항을 하다가 결국 이 일이 일파만파로 커지게 되는 내용입니다. 다들 결말을 예상하셨겠지만 화려한 과거의 경력을 가지고 있는 김부장의 폭주로 딸을 구해내고 딸을 괴롭히고 죽이려고까지 했던 대기업은 폭삭 망하게 되는 드라마입니다.

이 드라마 장면 중에 한 대사가 제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했습니다. 대기업의 딸은 김부장의 딸을 살인 미수에 시체 유기까지 하려 했는데, 이것을 대기업의 회장인 아빠에게 말하자, 아빠가 딸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아빠한테는 미안합니다 라고 말하는 게 아니야. 고맙습니다 라고 말하는 거지.’ 딸을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아빠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여러분에게는 이런 아빠가 있습니까?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인물이죠. 마가복음 10장 29~30절에서는 베드로가 내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다고 말하자, 예수님이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함께 말씀을 읽겠습니다.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는다고 합니다. 물론 이것은 실제적인 축복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나라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이죠. 수많은 형제 자매와, 소유를 통용하고 함께 모여 살기에 큰 축복이 임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한 관리가 와서 예수님께 절하였다고 합니다. 그의 이름은 야이로이며 회당장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모여 성경을 연구하고 토론하는 장소를 관리하고 주관하는 자였는데, 그의 딸이 방금 죽었다고 하며 예수님께 달려온 것입니다. 오늘 성경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마가복음 5장 24절에는 큰 무리가 따라갔다고 합니다. 많은 이들이 야이로의 딸이 과연 살아날 것인가 하는 기대와 호기심을 가지고 동행한 것이죠. 아마도 그 동네 사람들은 야이로를 모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그의 딸도 모를 수 없었을 것입니다. 모두가 아는 그의 딸, 야이로가 사랑하는 그의 딸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님은 걸음을 옮기십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밀치며 예수님과 동행합니다. 모든 이의 시선과 관심은 오로지 야이로의 딸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마태는 그녀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고 그저 그녀를 혈루병을 앓는 여인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한 문장이 그녀가 현재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혈루병은 여인이 하혈을 하는 난치병입니다. 레위기 15장에서는 여인의 부정함으로 다른 이들과의 접촉을 금지합니다. 그녀가 앉은 자리는 물론이고 그녀가 만진 것들도 접촉을 해서는 안됩니다. 만일 접촉을 하게 되면 외출을 해서는 안되고, 정결해지기까지 기다려야 하는 병입니다. 당연히 마을에서 격리가 되어야 하고, 누구와도 접촉을 해서는 안되기에 홀로 지내야 합니다. 마가복음 5장 26절에서는 이 여인은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나 아무 효험도 없고 도리어 병이 더 중하여졌다고 합니다. 그녀는 더 이상의 희망도 남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당시의 질병은 영적인 것과도 연결이 되어 병이 걸린 것은 죄로 인한 것이기에 정죄를 받던 시기였습니다.

오늘 이 여인은 어쩌면 죽음을 무릅 쓰고 이 장소에 나타났을 것입니다. 들켜서는 안됩니다. 율법에서 말하는 부정한 자가 지금 해서는 안 될 일을 하고 있습니다. 부정한 것은 죄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부정한 자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고 있으니 이건 죄인 것입니다. 그녀가 아무리 조심한다고 할지라도 그녀가 만지거나 스친 모든 것들은 부정한 것입니다. 그녀는 마지막 소망과 희망으로 예수님의 옷자락만이라도 스치고 그리고 아무 일 없던 듯이 돌아와야 하는 것입니다. 이 일이 알려져서는 안되고, 만약 낫는다면 이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인생을 살아야할 각오로 이 곳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왜?! 왜 예수님은 그녀를 부르신 것일까요? 오늘 성경 외에도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스쳐도 나은 자들이 많은데, 오늘 왜 에수님은 이 여인을 돌이켜 보신 걸까요? 왜 제자들에게 누군가가 나를 만졌다고 말하시는 걸까요? 지금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들 밀치고 난리도 아닌데, 급한데 왜 그곳에서 ‘스톱’을 외치시는 겁니까?

이 장면은 사실 이 여인도, 야이로도, 제자들도 원하지 않는 장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순식간에 부정한 사람이 되는 순간이었습니다. 모든 이가 격리를 해야하는 상황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왜 일을 이렇게 크게 만드시는 걸까요? 더욱이 여인이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 아셨다면 그녀를 그냥 그렇게 보내주셔야 하는 것이 맞을 텐데요. 다들 사랑하는 야이로의 딸이 살아나기를 기대하고 소망하고 있는데, 갑자기 왜 여기서 장면 전환을 하십니까? 모든 사람이 야이로의 딸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모든 이가 야이로의 딸이 살아날 것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예수님도 그런 줄 알았는데, 예수님은 그곳에서 멈춰 돌이켜 보십니다. 그리고 그녀에게 말씀하십니다. 딸아. 딸아. 딸아. 마가복음 5장 25절에서는 그녀가 열 두해를 혈루병을 앓았다고 합니다. 공교롭게도 누가복음 8장에서 말하는 야이로의 딸도 12살입니다. 같은 기간 동안 한 여인은 사랑 받으며 인정 받는 집의 외딸로 살아왔으나, 한 여인은 가족도 잃고, 재산도 잃고, 자신도 잃은 채로 살아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부르십니다. 딸아. 내 딸아. 이 여인은 얼마만에 이 사랑스런 고백을 들어본 것일까요? 내 딸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야이로의 12살 난 외딸을 바라보고 있을 때, 예수님은 열두 해를 혈루병으로 고통 받던 한 외로운 여인을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예수님의 옷자락을 믿음으로 만졌을 때, 그녀의 병이 나음과 동시에 그녀에게 새로운 정체성이 부여됩니다. 내 딸아. 이 여인은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이 여인에게 어떠한 아버지가 있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진정한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그녀의 병을 치유하는 것을 넘어, 그녀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던 외로움과 수치심과 정죄감과 두려움을 만지시는 예수님의 사랑의 고백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안심하라. 마가복음에서는 평안히 가라고 하십니다. 샬롬을 선포하십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병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에게 필요한 것은 참되시고 선하신 아버지를 만나는 하나님 나라, 평안이 필요했던 것이죠.

우리는 수많은 놀라운 기사들을 봅니다. 요즘 같은 시대에는 티비나 뉴스, 인터넷만 열어도 유명인들과 그들의 간증과 그들의 성공 사례와 그들의 영향력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정말 놀라워 보입니다. 많은 이들이 그들을 보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 같고, 하나님 또한 그들을 통해 영광 받으시는 것 같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은 모든 이들의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십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은 돌이켜 보십니다. 돌이켜 가난하고 병들고 약한 자들을 보십니다. 어쩌면 그들의 작은 믿음을 보시고 많은 이들이 불편하게 생각하고 많은 이들이 거들떠 보지도 않는 그들에게 더 많은 관심을 보이시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곁에는 오히려 병들고 가난하고 이름 없는 자들이 더 많았습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들의 집에서 함께 먹고 마시며 그들과 유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병든 자들과 귀신 들린 자들과 포로된 자들을 치유하고 자유케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은혜의 해를 선포하며 구원을 명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아무도 보지 않는, 아니 봐서는 안되는 한 여인을 주목하시고 그녀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녀의 삶을 바꾸셨습니다. 그녀를 자녀 삼으시고, 그녀를 내 딸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에수님은 그녀를 위해 이제 하지 못하실 것이 없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까지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되셔서 그녀를 위해 역사하실 것입니다. 왜 이 사건이 야이로의 사건 속에 등장하는 것일까요? 마태, 마가, 누가는 왜 동일하게 야이로의 사건 안에 이 이름 없는 여인의 사건을 기록한 것일까요?

우리의 삶도 이와 같습니다. 누군가의 삶 속에 조연 또는 엑스트라로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명망 있고 출세한 능력 있는 누군가에게 많은 이들의 시선이 쏠리고 예수님의 능력까지 더해지는 것 같아, 나는 작고 초라한 사람이며, 감히 그 길에 서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조용히 작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옷자락만 만지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혈루병 여인처럼요. 이 생각은 여러분의 생각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며 고민하고 전하는 저의 생각일 것입니다. 교회 개척을 준비하며 외로웠습니다. 많은 이들이 점점 거리를 두는 것 같고, 실패한 것 같은 마음이 많이 듭니다. 비교해서는 안되겠지만, 너무 좋고 멋지고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교회들이 참 많습니다. 뛰어난 목회자, 인정 받는 목회자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저희 교회와 저는 굳이 다른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은 돌이켜 보십니다. 돌이켜 나를 보시고, 나의 교회를 보십니다. 이름 없는 나를 위해 가던 길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내 이름을 불러주십니다. 내 딸아. 내 아들아. 안심하라. 평안히 가라. 네 맞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이렇게 하는 게 맞나. 혹은 이렇게 해야 하지 않나. 주저함과 무료함과 분주함이 삶 속에 묻어 있습니다. 어찌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고 싶어 울부짓습니다. 나같은 자도 예수님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고 싶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돌이켜 보시고, 멈추십니다. 어쩌면 이 시선은 한 순간이 아닌, 내가 예수님 앞에 등장한 모든 시간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는 저의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의 고백은 어떠합니까? 여러분은 오늘 어떠한 심정으로 이곳에 오셨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시선이 여러분을 향해 있음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담대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십시오. 나같은 사람이 무얼하느냐, 나같은 사람이 어찌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느냐. 나같은 이미 버려진 인생이 무얼하느냐 라는 자포자기한 삶이 아니길 소망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향한 시선을 멈추지 않으십니다. 과감히 가던 길을 멈추시고 나를 돌아보십니다. 그리고 내게 말씀하여 주실 것입니다. 내 딸아. 내 아들아. 안심하라. 평안히 가라.

함께 찬양하며 기도하길 원합니다. 나같은 자를 사랑하신, 나같은 이도 자녀 삼으신 주를 고백하며 찬양하기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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