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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1109 함께지어져가는교회 설교

그리스도인의 무기

마태복음 5:38-42
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42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예전에 도로 위에서 정말 간담이 서늘한 경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난폭한 운전자가 밤에 라이트를 켜고 고속도로를 달리는데, 제 뒤에 바짝 붙어 빨리 가라고 라이트를 깜박거린 것입니다. 저는 위협을 느껴 비켜 주었지만, 밤에 하이빔을 켜니 위험하기도 생각하였고, 너무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똑같이 되갚아 주었습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그 운전자는 제 옆으로 같은 속도로 달리며 저를 위협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약 5분 간을 같이 달렸는데, 정말 식은땀을 흘릴 정도로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물론 저도 잘한 것은 없지만 고속도로 위에서 그런 일을 당하니 정말 무섭고 운전을 마친 후에도 부정적 감정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도 난폭 운전하는 사람을 보면 말은 안했지만 정말 짜증나고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아마도 그 날은 제 안에 있던 감정이 폭발하여서 똑같이 당해봐라 하는 식으로 행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냥 그렇게 지나갈 줄로만 생각했던 차량이 제게 이전 보다 더 큰 위협을 하는 것을 보고 무서움과 동시에 후회가 몰려 왔습니다. 어찌됐든 저도 똑같은 일을 행한 것이니까요. 두려움과 후회, 죄책감이 몰려왔습니다. 이 일은 거의 5년이 넘은 일인데, 아직도 생각이 나는 것을 보니 그 때의 경험과 감정이 아직 가시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런 의미로 보복 운전에 대한 법이 생긴 것이 너무나 이해가 됩니다. 보복 운전은 되갚아 주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더 큰 불상사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매우 어려운 말씀을 하십니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상합니다. 당연히 받은 대로 돌려주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죠.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못하도록 본때를 보여주어야 하지 않습니까? 모세가 율법을 주었을 당시의 사회는 법과 질서가 완전하게 형성되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자신과 가족과 민족의 생명을 위해서는 보호와 방어가 필요했습니다. 스스로 방어하거나 돌려주지 않으면 생명과 재산을 뺏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보복과 복수의 한계는 없는 법이죠. 당한 만큼만이 아니라 다시는 그런 일일 발생하지 않도록 받은 것보다 더 큰 것으로 보복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고 한계를 정해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모세에게 받은 율법은 그러하나 이제 다시 율법을 새롭게, 완전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율법을 주신 목적과 이유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39절에 ‘누구든지 네 오른편 빰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라고 하십니다. 선빵도 모자른 판에 맞으면 다른 쪽도 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당시의 사회의 기준은 오른손잡이의 기준이었기 때문에, 오른편 뺨을 맞는 것은 손등으로 때린 것입니다. 손등으로 때린다는 것은 종들이나 하급자에게 행하는 사회적 모욕과 수치심을 주는 행위였습니다. 바로 나의 복수의 한 방이 날아가야 하는데, 예수님은 왼편을 돌려 대라고 하십니다. 보복하지 말고 그대로 더 맞으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왼편을 돌려 대는 것은, 내가 종이 아니고 하찮은 존재가 아니고 인격적 존재로서 너에게 대항하겠다는 의미입니다. 너에게 모욕과 수치를 주는 사람에게 보복이 아니라 침묵과 축복으로 존귀함을 나타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악에 대항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말라고 하십니다. 악을 선으로 갚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40절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라고 하십니다. 속옷을 달라는 것은 완전한 모욕과 수치를 의미하는데, 오히려 겉옷까지 주라는 말씀은 어떤 의미일까요? 당시의 겉옷은 생존권이었습니다. 특별히 가난한 자들에게 겉옷은 추위를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보호장치였습니다. 때문에 출애굽기 22:26-27 에는 겉옷으로 전당을 잡은 자가 갚지 못할지라도 겉옷은 돌려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를 고발하여 속옷까지 가져가는 자에게 나의 생명의 상징인 겉옷을 주라는 것입니다.  나를 고발하는 자를 고발하는 대신, 이것은 하나님 앞에 고발하는 비폭력 항거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분이신데, 특별히 가난한 자들의 남은 겉옷마저 가져가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이기 때문입니다. 무참히 짚밟히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리 앞에 지혜롭게 대응하라는 말씀이십니다.

41절의 말씀도 이와 같습니다.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 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 하라고 하십니다. 당시 시대는 로마시대였고 로마 군인이라면 언제든지 유대 사람들에게 오 리를 가라고 명령할 수 있었습니다. 부당한 처사이지만 오히려 이에 대응하여 오히려 두 배가 되는 십 리를 가라고 하십니다. 죄에 굴복하지 않고, 스스로 자발적으로 그를 대하라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나를 이용하려 할 때 기꺼이 하나님의 진리 앞에 사랑으로 두 배 이상의 거리를 함께 가라는 것입니다. 악에게 끌려가지 말고 선으로 그를 이끌라는 것이죠. 42절의 말씀으로 예수님은 ‘구하는 자에게 주며 꾸고자 하는 자를 거절하지 말라’ 고 하십니다. 구걸하는 자나 돈을 요구하는 자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꾸어주라고 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선용하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모세의 율법 대신 주신 말씀은 매우 어려워 보입니다. 당한 대로 갚아주는 것도 모자란데 더 당해주라는 의미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살다가는 정말 호구 처럼 살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그런데 그런 분이 계십니다. 흔히들 예수님을 바보라고 합니다. 바보 예수. 예수님은 자신의 것을 다 내어 주셨습니다. 고발 당한대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맞은 대로 돌려주지 않으셨습니다. 배신 당했지만 복수하지 않으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죽는 순간까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긍휼히 여겨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자신들을 배신하고 도망간 제자들을 다시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는 바울에게도 나타나셔서 하나님의 그릇으로 쓰임 받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은 단순히 죄지은 자에게 어떻게 행해야 하고, 죄를 지은 자들이 받은 형벌이 무엇인지 가르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자신의 자녀들이 죄 가운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의로움과 선하심 속에 있기를 바라십니다. 죄인이라 할지라도 구원하시기 위해 사랑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쁨으로 보내주셨습니다. 그런 분이 하나님이신데, 죄 지은 자라고 바로 벌하시기 원하실까요? 하나님은 그런 자들에게도 기회를 주십니다. 그 기회는 하나님을 믿는 신실한 자들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말했던 사도 바울은 스데반 집사의 순교의 순간에 회심이 일어났습니다. 그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어찌 죽음 앞에서도 사랑을 놓지 않는가에 대한 의구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당연히 저주와 욕설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랑과 정의 앞에 찔림을 받았던 것이죠.

무기로 정복되는 사람과 민족은 다시 무기로 망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칼로 흥한 자는 칼로 망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강력한 무기는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당장 내 눈 앞에 보이는 손해와 아픔과 상처와 때로는 죽음까지도 더이상 인내심을 발휘할 수 없을 것만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먼저 그 길을 가셨습니다. 우리의 아픔과 슬픔에 공감하시기 위해 그 가시밭 길을 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악한 자를 대적하지 않는 방법입니다. 악은 또다른 악을 낳죠. 이것은 사단의 전략입니다. 그는 복수와 적대심을 이용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이 모든 것을 덮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무기로 살아가는 자들로 인해, 복수와 적대심의 종지부를 찍고 종전의 승전보, 하나님 나라의 평화를 알리는 것이죠.

“여러분, 지금 마음에 떠오르는 누군가가 있습니까? 그 사람을 미워했던 마음 대신, 오늘 이 말씀으로 사랑의 결단을 하십시오.”

이 시간 함께 기도합시다. 과연 우리는 나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준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베풀 수 있을까요? 어렵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대로 사는 삶입니다. 하나님께 간구합시다. 내게 하나님의 사랑을 가득 부어주셔서 악을 선으로 갚아낼 수 있는 사람이 되게해 달라고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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