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vigate_before
navigate_next
arrow_back

다시합시다

13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14요한이 말려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서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내게로 오시나이까
15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16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17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어 말씀하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3:13-17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라는 드라마를 보셨나요? 저는 다 보진 못하고 몇 장면만 보았는데, 참 인상 깊은 드라마였습니다. 장애를 가진 여인 우영우는 사회적 편견과 불편함 속에서 자신만의 색깔로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이 참 아름다웠습니다. 그녀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죠. “기러기, 토마토, 스위스, 인도인, 별똥별, 우영우. 거꾸로 해도 우영우.” 거꾸로 읽어도 같은 단어가 되는 방식을 회문이라고 합니다. 그녀는 세상이 보기에는 다른 사람 같으나 다시 돌아보면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는 일반인과 다름이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리고 회문 형식의 문장도 있습니다. ‘다시합시다’ 거꾸로 해도 ‘다시합시다’ 입니다. 회문 형식에 매우 잘 어울리는 문장입니다.

다시한다는 것은 실패를 의미할수도 있습니다. 미완성의 일들을 다시 완성하기 위해 시도하는 것이죠. 우리는 많은 일들을 다시하고 있습니다. 어떤 과업을 이루고 해결하기 위해 또다시 출발선에 설 때가 있습니다. 다시한다는 표현은 실패를 의미할수도 있지만, 어쩌면 포기하지 않는 열정과 완성의 실루엣이 아닐까요? 다시한다는 것은 정확한 목표와 방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니까요. 사람은 실수합니다. 사람은 실패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실수하시고 실패하실까요? 하나님은 실수가 없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고 신실하셔서 모든 것을 온전케 하시고 이루시는 주님이십니다.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다. 완전하신 하나님이 왜 인간이 죄를 짓게 하셨냐고. 하나님은 완전하시기에 인간들과 인격적인 교제를 하기 원하셨습니다. 로보트나 피동적인 존재로 만들지 않으셨죠.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서로 교제를 하듯이 코이노니아를 위해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그들을 통해 하나님과의 교제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실패했죠. 죄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셨습니다. 미래는 아직 오직 않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의 시각이죠. 우리의 차원이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미래도 인류의 미래도, 모든 것을 아십니다. 그래서 천지를 창조하시기 전에 이런 회의가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우리가 우리를 닮은 형상을 지을 것인데, 분명 인간들은 실패할 것이다. 그 실패를 회복하고 해결할 방법을 찾아보자.’ 그리고 모두의 눈이 예수님께로 향했겠죠. 예수님이 무엇을 해야할지 아셨을테니까요. 하나님은 죄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위해 수많은 방법들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셨습니다. 아담을 통해, 노아를 통해, 아브라함을 통해, 이삭과 야곱과 요셉 그리고 다윗과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여정을 이루어 가셨습니다. 그 때마다 하나님은 이 회문을 말씀하셨을 것 같아요. ‘다시합시다’ ‘다시합시다’ ‘다시합시다’

이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열심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열정이죠.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완성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입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그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 13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셰레를 받으려 하시니’ 요한이 요단강가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푼다는 소식을 듣고 예수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 강까지 오셨습니다. 이 여정은 5일을 꼬박 걸어야 하는 여정입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지 않아도 되는 분이시지만 세례 요한이 있는 요단강까지 겸손함으로 오셨습니다. 광야를 지나 오신 것이죠.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낮은 요단강으로 내려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이 말하는 것입니다. 14절의 말씀이죠. 제가 가는 것이 맞는데, 왜 오셨습니까? 그리 먼 길을 저를 보려고 이곳까지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1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세례의 의미는 죄인된 내가 구원 받았음을 선포하는 의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으신 분이신데 허락하라고 하십니다. 나를 죄인으로 여겨 세례를 베풀라고 하십니다. 세례의 의미는 예수님의 ‘다시합시다’의 선포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여정이 다시 시작된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회복이 임재가 선포된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시는 것이죠. ‘이제 허락하라’ 이제 다시 시작하자 입니다. 이것은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서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의’ 는 단순한 옳음이 아닌 율법이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이 땅에 오셨으니까요. 하나님의 나라의 놀라운 역사가 다시 시작되었음을 선포하기 위해 오셨으니까요. 구약의 첫 출발과 신약의 첫 출발이 정확히 일치함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다시 선포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수면 위의 예수님에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내려 임재하셨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그리고 성령님 이렇게 삼위일체의 하나님께서 한 자리에 다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시는 것이죠. 그리고 놀라운 하늘의 선포가 있습니다. 17절의 말씀을 같이 읽겠습니다.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이 표현을 이렇게 바꾸면 어떨 것 같습니까?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하나님 나라와 구원의 여정을 다시 시작하는 예수님을 향한 아름다운 사랑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천지를 지으시고 기뻐하셨던 하나님의 음성이 다시 내려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다시 시작하십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를 향한 역사와 이적을 멈추지 않고 이루고 계십니다. 모든 의를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오늘도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세례의 사건은 2000년 전의 이벤트가 아니죠. 오늘도 ‘다시합시다’ 라고 외치시는 하나님의 열심의 선포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으시고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시며 쉴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 하나님은 여전히 내 삶에도 선포하십니다. 순태야 다시하자. 어김 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는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순태야 다시 하자. 다시 시작하자. 나의 나라, 새 하늘과 새 땅을 위해 다시 시작하자. 너의 삶에 나의 성품과 계획이 다시 심어지길 원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일을 위해 나의 죄를 위해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를 위해 다시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연약함은 계속 과거의 실패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오히려 죄의 반복만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어쩌면 내 안의 죄된 본성도 소리치는 것 같습니다. ‘죄를 다시 하자’ 라고. 그러나 여전히 제 안의 성령의 음성이 들립니다. ‘순태야 다시 하자. 다시 시작하자’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 시작 이래 아니 태초부터 지금까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나를 위해 오늘도 역사하시는 나의 주님이십니다.

저는 다시 주님 앞에 섭니다. 여러분은 현재 어디에 계십니까? 다시 시작할 용기가 있습니까? 다시 일어서 주를 향해 나아갈 준비가 되어 있으십니까? 여러분을 향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실 용기가 있나요? 우릴 향해 부르시는 주님의 열심에 응답하실 수 있겠습니까? 오늘 잠시 눈을 감고 주 앞에 머무르는 시간을 갖길 원합니다. 주님이 내게 행하신 일들과 행하실 일들을 사모합니다. 다시 시작하기 원합니다. 고백합시다.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