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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하는 사랑이 아닌 사랑

20251123 함께지어져가는교회 설교

누구나 하는 사랑이 아닌 사랑

마태복음 5:43-48
43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4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45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46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7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48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제 취미 중 한 가지는 책읽기 입니다. 중고서점에서 책을 고를 때 기분이 좋았고, 간혹 집 근처로 오는 이동도서관에서 책을 고르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책을 고르다 보면 제목만 보고서도 끌릴 때가 있습니다. 마치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으로, 나와 잘 맞을 것 같은 기분으로 첫인상 좋은 책을 만나는 것이죠. 그런데, 전혀 손이 가지 않는 책도 있습니다. 특별히 이런 종류의 책은 범접할 수 없는 제목의 책이었습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기’ 제목만 읽어도 숨이 막혀 옵니다. 사랑은 쌍방향이 아름다운 결론이죠.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이라도 짝사랑은 정말 괴롭습니다. 게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기란 정말 인간의 영역이 아닌듯 합니다. 더욱이 나를 미워하거나, 내가 싫어하는 사람의 관계라면 사랑의 관계는 멀고 먼, 한계를 넘어선 영역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본문 43절의 말씀은 당연히 그래야 하지 않나라고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은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시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드는 것은 내 이웃의 범위가 어디까지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이웃을 자신의 민족까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이나 사마리아인 또는 율법을 벗어난 죄인들은 이웃의 범위에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의 이웃을 한정지었고, 그 울타리 밖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의 대상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이웃이 아니니 미워해도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함께 출애굽기 23:4-5, 잠언 25:21 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은 이웃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후대의 유대인들이 사랑의 범위를 축소시킨 것이죠.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율법을 완전하게 하고 계십니다. 44절의 말씀을 읽겠습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45절의 말씀으로 그렇게 순종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해를 비추시고 비를 내려주신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순종하는 자들에게만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시는 것이죠. 탕자와 같은 자녀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러나, 큰 아들은 아버지의 곁에 있었으나 아버지의 유산을 받고 떠난 동생을 정죄하고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찾지도 않았습니다. 동생이 돌아와도 오히려 그를 반기는 아버지를 비난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마치 이 큰 아들과 같습니다. 악인과 불의한 자들은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바로 예수님이 그런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달고 조롱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저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르니 하나님께서 저들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중보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스데반 집사도 자신의 설교를 듣고 분노하여 자신에게 돌을 던진 자들을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저들을 긍휼히 여겨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마태복음 5:9 은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라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 죄인들을 위해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멀어진 사람들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사람들은 죄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십자가로 연결된 것이죠.

예수님은 이 땅의 죄인들을 벌하러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다면 그 간극은 더 커지고 분열은 더 확산되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조차 예수님이 당시의 부조리를 해결하고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주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라치기하고 전쟁하여 회복하는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와 공의로 통치되는 나라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며, 사랑의 가장 강력한 무기를 통해 원수된 사단을 물리치셨습니다. 43절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은 원수의 속삭임과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시 직면하십니다. 함께 46~47절을 읽겠습니다. 내 편에 선 자들을 사랑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세리나 이방인들도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십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미워하는 일은 하나님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원수된 자들을 위해 자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화평케하기 위하여 하나 뿐인 사랑하는 독생자를 보내시고 십자가를 지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온전하게 하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자신의 식대로 생각하고 옳지 않게 가르치는 것을 바로 잡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알고 지키는 것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가르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을 한정하고 그들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요한복음 3:16의 말씀은 특정한 누군가를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모든 인류, 이전 세대와 오는 세대를 포함한 모든 자에게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신 것은, 바로 모든 자를 사랑하시는, 원수까지도 자격 없는 자들까지도 사랑하신 사랑, 바로 하나님의 성품인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온전하신 사랑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하나님과 거룩한 교제를 위해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입니다. 자신의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닌, 하나님의 온전하신 성품을 알아가기 위한 교재입니다. 하나님은 온전하신 사랑으로 인해, 우리와 더욱더 풍성한 삶을 누리기 위해, 풍성한 교제를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온전하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온전하시기에 우리도 온전하라고 하십니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죠. 나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를 미워하는 사람까지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하는 것입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당연히 받은 대로 갚거나, 더 많이 응징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온전하신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셨습니다. 사실, 누군가를 미워하고 비난하고 증오하는 모든 일들은 결국 나를 아프게 합니다. 내가 만든 마음 속의 감옥에 원수들을 가둬놓고 그들을 계속 보고 있는 것이죠. 그들을 계속 품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죄값을 치를 비용도 가치도 모르는 자들입니다. 결국 내가 그들을 탕감하지 않으면 영원히 나의 감옥에 그들이 거하게 되는 것이죠. 하나님은 그것을 아십니다. 사랑 없이는 주를 볼 수 없기에, 조건 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먼저 용서하시고 사랑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명령과 계명은 결국 나를 위한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고, 그들을 풀어주는 것이 진정 나를 위한 방법입니다.

저도 용서하지 못하는, 당연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준비하기가 매우 어렵고 포기하고 싶었습니다. 저도 못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싫었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말씀은 제가 잘 할 수 있어서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도 못합니다. 그러니, 같이 하자고 여러분 앞에 공개적으로 선포하는 것입니다. 여전히 원수를 미워하고 싶은 마음들이 있습니다. 도저히 용납이 안되고, 더 많은 이들에게 그들의 악행과 추함을 알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사랑. 내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도저히 용납이 되지 않고 이해되지 않는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온전하심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내가 온전하듯 너도 온전하라. 사랑하고 싶습니다. 그 사랑을 경험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지금 생각나는 사람이나 경험이 있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온전하니, 내가 사랑하니, 내가 용서하니, 너도 사랑하고 용서하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있겠냐고 하십니다. 누구나 하는 사랑 말고, 하나님의 사랑을 하라고 하십니다. 우리 함께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마음을 구합시다. 그래서 내게 주시는 마음 또는 결단이 무엇인지 함께 기도하며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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