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전파하여
12예수께서 요한이 잡혔음을 들으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가
13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14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17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마태복음 4:12-17
2025년 5월 31일 오후 경북 구미시민운동장에서 열린 ‘구미 아시아육상선수권대회’에서 남자 계주 400m 결선에서 우승한 대표팀이 한국신기록이자 대회신기록인 38초 49를 세우며 우승하였습니다. 4명의 선수는 각각 100m 씩 달리다가 바턴을 넘겨주며 이어 달리는 경기인데, 각 레인마다의 선수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1번 주자는 스타트가 좋고 코너 주행이 좋은 사람이 달리고, 2번 주자는 직선 주로의 빠른 스피드를 낼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3번 주자는 1번과 2번의 달리기의 흐름을 잘 유지하고 안정된 페이스를 유지하는 사람이며 곡선 주로의 라인을 잘 타고 달려야 합니다. 마지막 4번 주자는 최종 스퍼트를 낼 수 있고 승부사 기질이 있는 사람이 달리게 됩니다. 그리고 계주의 가장 중요한 요소는 약 20m의 바턴존에서 앞주자의 탄력을 다음 주자가 이어 받아 흐름을 이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계주에서의 승부는 대부분 바턴을 얼마나 잘 주고 받느냐에서 결정이 됩니다.
오늘 성경을 읽어보면 세례 요한에서 예수님께로 복음의 바턴이 넘어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매우 열정적으로 전파하였습니다. 마태복음의 3장은 세례 요한의 사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라고 광야에서 외쳤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복하고 회개하며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도 세례 요한을 알게 되어 보러 왔을 정도이니까요. 그런데 세례 요한은 미리 자신의 역할을 알고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3장 11절에서 그는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더 능력이 많다고 하였습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 예수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3:30에서 세례 요한은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라고 자신의 종말을 암시합니다. 그는 정확히 자신이 달려야할 구간을 알았던 것이죠. 오늘 본문 12절에 그는 잡혔다고 나옵니다.
그는 복음을 선포하는 동시에 사회의 불의를 고발하였습니다. 헤롯 대왕은 3명의 아들에게 이스라엘을 나눠서 통치하도록 하였는데, 예루살렘 지역은 헤롯 아켈라오, 갈릴리 지역은 헤롯 안티파스, 이두레 지역은 헤롯 빌립에 의한 통치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과 마리아는 폭정을 일삼는 헤롯 아켈라오를 피해 갈릴리 지역으로 이주하였죠. 그런데 갈릴리 지역의 분봉왕 헤롯 안티파스도 부도덕한 사람이었습니다. 자신의 형제의 아내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기 때문이고, 이를 고발한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둔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결국 헤롯 안티파스에 의해 죽임을 당합니다. 그의 달리기가 끝난 것이죠. 예수님은 이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12절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마지막을 아시고 갈릴리로 물러가셨다고 합니다. 사실 저는 이 말씀을 읽었을 때, 아니 왜 예수님은 요한을 구하러 가지 않으시지? 또는 왜 당당히 요한처럼 복음을 선포해야 하는데 물러가시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왜 갈릴리로 물러가셨을까요?
오늘 말씀은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셨다고 합니다. 왜 그곳에 가셔야만 했을까요? 그곳에 무엇이 있길래? 피난처일까요? 도피처일까요? 다시 세력을 도모하기 위한 베이스캠프가 있는 걸까요? 저의 이런 생각은 다 틀렸습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께서 말씀을 이루려고 그곳에 가셨다고 합니다. 오늘 15~16절의 말씀은 이사야 9:1~2의 말씀의 인용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정확히 알았습니다. 그리고 세례 요한이 어떠한 죽음을 맞이할지도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가버나움으로 물러가신 것입니다. 흑암에 앉은 백성에게 큰 빛이시며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되시려고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준비하러 가신 것입니다. 당장이라도 예수님은 큰 일을 이루시고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실 수 있지만, 예수님이 세례 요한의 역할을 아셨던 것처럼, 자신의 역할도 정확히 아셨던 것입니다.
이제 세례 요한과 예수님은 바턴을 이어 받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은 바턴존에 있는 것이죠. 세례 요한의 선포는 이제 예수님의 선포가 됩니다. 17절의 말씀입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예수님은 이제 복음의 바턴을 이어 받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이제 본격적인 하나님 나라가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였음을, 하나님의 심판이 도래했음을 알리는 마지막 주자가 나선 것이죠. 저는 오늘 말씀을 준비하면서 세례 요한의 사역과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이 중간 과정이 매우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이 과정이 매우 아름답다고 느꼈습니다. 서로가 서로의 역할을 정확히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어가는 이 과정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나라의 모습이라는 감동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나라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루어지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의 명령하신 대로 사는 나라입니다. 하나님이 각 사람에 주신 권한대로 각자의 사명으로 사는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히브리서 5:8의 말씀처럼 고난으로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죠. 모든 것이 가능하신 우리 예수님은 인간의 한계로, 하나님의 신실한 말씀 안에 거하셨습니다. 그렇게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십니다. 서두르지 않고, 절차에 맞게, 때를 맞춰 시작합니다. 이 말씀을 기록한 마태는 마치 예수님의 사역이 더딘 것처럼 표현합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어머니 마리아의 간청에도 자신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말씀하셨듯이 예수님은 철저히 하나님이 정하신 때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때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신의 때를 알지 못합니다. 대부분 서두르거나 조급해 합니다. 도대체 언제 나의 시대가 열릴지, 어떻게 해야 나의 때를 볼 것인지, 다른 이들은 어떻게 하는지 부러움을 넘어 시기심으로 바라보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자신의 때를 기다립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멈출 줄 압니다. 세례 요한의 고백처럼 내 뒤에 오시는 이를 기다리고, 나는 쇠하고 그는 흥하여야겠다라는 고백은 이 시대 성공에 목말라하는 많은 이들에게 경종을 울립니다. 마치 레인에 선 달리기 선수가 바턴을 빨리 받기 위해 이전 주자의 트랙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고, 다음 주자에게 바턴을 넘겨주지 않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말씀은 아름다운 바턴존을 보게 됩니다. 서로의 때를 알고 적절히 그 바턴을 넘겨주는 모습입니다. 자신은 돋보일지 모르겠으나, 경주는 망합니다. 그 누구도 승리의 결승점에서 웃을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은 제게 주시는 하나님의 권면의 말씀이자, 위로의 말씀입니다. 능력은 때가 아닙니다. 내가 준비되었다고 해서 나의 때가 된 것이 아닙니다. 또는 내가 준비되지 않았다고 해서 나의 때가 이르지 않은 것도 아닙니다. 오직 나는 주님이 가라하면 가고, 서라 하면 서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매번 잊게 됩니다. 매번 조급해 하고, 나의 현재 모습에 불만족하고 초라함을 느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례 요한을 이렇게 평가합니다. 여자가 나은 이 중 가장 큰 자라고 하십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알았고, 자신의 때를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로 다스려지는 나라입니다. 그 나라에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신뢰 그리고 순종이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순종으로 자신의 때를 기다리고 자신의 역할의 한계를 아셨습니다. 하물며 저와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혹시 우리는 바턴존을 넘어서 경주에서 벗어나거나 지나친 욕망으로 인해 레인을 벗어난 것은 아닌가요?
우리의 가정, 우리의 교회 함께지어져가는 교회는 지금 어떤 과정 가운데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우리는 준비가 된 것도 같고, 전혀 준비가 안되어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의 판단이 아니죠. 저도 요즘 여러 사람들을 만나며, 교회를 위하여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어떤 길과 여정이 있는지 듣게 됩니다. 그런 메시지들은 저를 전혀 평안케 하지 못했습니다. 조급하거나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통해 다시 깨닫게 됩니다. 내가 의지할 것은 오직 주의 말씀입니다. 나를 부르신 주의 음성을 듣고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때를 알기 원합니다. 오늘 함께 기도할 때, 우리 교회가 어떻게 나아갸야 하는지, 우리 교회를 향한, 우리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지 들어보도록 합시다.